오곡밥과 묵은나물 — 대보름 밥상에 담긴 '여름 준비'
정월대보름 아침상의 주인공은 오곡밥과 묵은나물입니다. 둘 다 따로 새로 장만하는 음식이 아니라, 지난가을에 거둬 겨우내 갈무리해 둔 곡식과 나물을 꺼내 쓰는 음식입니다. 그래서 이 밥상에는 겨울 저장고를 정리하고 새해 농사를 준비한다는 의미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오곡밥에 들어가는 곡식
'오곡'은 다섯 가지 곡식이라는 뜻이지만, 정해진 다섯 가지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집과 지역에 따라 그해 거둔 곡식을 섞었습니다. 많이 쓰는 조합은 다음과 같습니다.
| 곡식 | 미리 손질 | 역할 |
|---|---|---|
| 찹쌀 | 2~3시간 불리기 | 밥 전체의 찰기 |
| 팥 | 한 번 삶아 첫 물 버리기 | 붉은 색과 고소한 맛 |
| 검은콩 또는 서리태 | 반나절 불리기 | 씹는 맛 |
| 수수 | 여러 번 비벼 씻어 떫은맛 빼기 | 쫀득함 |
| 차조 | 씻기만 하고 마지막에 넣기 | 작은 알갱이가 밥 사이를 채움 |
곡식마다 익는 속도가 달라 손질 순서가 중요합니다. 팥처럼 단단한 것은 미리 삶고, 조처럼 작은 알갱이는 뜸 들이기 직전에 얹는 식입니다. 『한국세시풍속사전』에 따르면 찰기가 있는 곡식을 섞어 짓기 때문에 '찰밥'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찜기로 짓는 옛 방식, 솥으로 짓는 요즘 방식
오곡밥은 원래 밥솥이 아니라 시루나 찜기에 쪄서 지었습니다. 찹쌀은 물에 넣고 끓이면 질척해지기 쉬워서, 김으로 익히는 편이 알갱이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찜기로 찌기
- 불린 찹쌀과 잡곡, 삶은 팥을 고루 섞습니다.
- 김이 오른 찜기에 젖은 면보를 깔고 곡식을 펴 올려 30분 정도 찝니다.
- 중간에 소금을 녹인 물(팥 삶은 물을 써도 됨)을 고루 뿌리고 뒤적인 뒤 다시 찝니다. 이 과정을 한두 번 반복하면 간이 배고 찰기가 생깁니다.
- 차조는 마지막 뿌릴 때 함께 얹어 10분쯤 더 찝니다.
밥솥으로 짓기
전기밥솥의 잡곡 또는 찰밥 기능을 쓰면 됩니다. 찹쌀은 흡수가 빨라 물을 평소 밥보다 적게 잡고, 팥 삶은 물을 섞으면 색이 곱게 납니다. 소금을 약간 넣는 것이 찜기 방식의 소금물 맛을 내는 요령입니다.
묵은나물 — 진채식
『동국세시기』는 대보름에 지난해 말려 둔 나물을 삶아 먹는 것을 진채식(陳菜食)이라 하고, 이렇게 먹으면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적었습니다. '묵은(陳) 나물(菜)'이라는 뜻입니다. 많이 쓰는 나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 호박고지 — 늦여름 애호박을 얇게 썰어 말린 것
- 무시래기 — 김장 무의 잎과 줄기를 엮어 말린 것
- 고사리·고비 — 봄에 꺾어 데쳐 말린 것
- 가지·토란대·취나물·도라지 — 지역과 집에 따라
봄에 말린 고사리부터 늦가을 시래기까지, 한 해 동안 모아 둔 것을 이날 한꺼번에 꺼내는 셈입니다. 봄에 어떤 나물을 말려 두었는지는 봄나물, 절기 따라 먹는 순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른 나물 불리고 볶는 순서
- 불리기 — 전날 밤부터 물에 담가 둡니다. 고사리·시래기처럼 질긴 것은 한 번 삶은 뒤 다시 불립니다.
- 밑간 — 물기를 꼭 짜고 국간장·다진 마늘·들기름으로 조물조물 무쳐 둡니다.
- 볶기 — 팬에 들기름을 두르고 볶다가 물이나 멸치 육수를 조금 붓고 뚜껑을 덮어 뜸을 들이듯 익힙니다.
- 마무리 — 불을 끄고 깨와 파를 뿌립니다.
나물마다 따로 볶아 한 접시에 색깔별로 담는 것이 보통입니다. 아홉 가지를 맞춰 담는 집도 있었는데, 숫자에 특별한 규칙이 있다기보다 넉넉하게 차린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남은 나물은 오곡밥과 함께 큰 그릇에 넣고 고추장이나 간장, 들기름을 더해 비벼 먹어도 좋습니다. 대보름 다음 날 남은 나물로 비빔밥을 해 먹는 집이 많았던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볶은 나물은 냉장고에서 사나흘 정도 두고 먹을 수 있습니다.
시래기와 호박고지는 들기름을 넉넉히 써야 부드러워지고, 고사리는 국간장으로 간을 해야 색이 깔끔하게 납니다. 나물마다 어울리는 기름과 간이 조금씩 다릅니다.
복쌈과 '세 집 밥'
대보름에는 김이나 취잎, 배춧잎에 밥을 싸서 먹는 복쌈 풍속도 있었습니다. 복을 싸서 먹는다는 뜻입니다. 또 아이들이 성씨가 다른 세 집 이상을 돌며 오곡밥을 얻어먹으면 그해 운이 좋다고 여겼습니다. 집집마다 넉넉히 지어 이웃과 나눈 것도 이 때문입니다. 대보름 하루의 다른 풍속은 정월대보름에서 시간 순서로 정리했습니다.
참고한 자료
- 홍석모, 『동국세시기』(1849) 정월 상원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해제 참고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 '오곡밥'·'진채식'·'복쌈' 항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오곡밥' 항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