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뱅 리튬 문제: 사라진 리튬, 표준 우주론의 균열인가?
빅뱅 리튬 문제(Big Bang Lithium Problem)는 현대 우주론의 가장 성공적인 이론인 빅뱅 모델의 눈부신 성공 이면에 숨겨진, 작지만 끈질긴 그림자입니다. 빅뱅 핵합성(Big Bang Nucleosynthesis, BBN) 이론은 우주 탄생 후 단 몇 분 동안 어떤 원소들이 얼마나 만들어졌는지를 놀라운 정밀도로 예측하며, 이는 표준 우주론을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기둥 중 하나입니다.
이 이론은 수소, 헬륨, 그리고 극소량의 리튬(Lithium) 등 가벼운 원소들의 초기 존재비를 예측했는데, 수소와 헬륨의 경우 실제 관측된 우주의 값과 경이로울 정도로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하지만 유독 리튬, 특히 리튬-7(⁷Li) 동위원소의 경우, 이론적 예측값이 실제 늙은 별들의 대기에서 관측되는 값보다 약 3~4배나 많다는 심각한 불일치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사라진 리튬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이 불일치는 우리가 아직 모르는 새로운 입자물리학의 단서일까요, 아니면 별의 진화 과정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불완전하기 때문일까요? 이 글에서는 '리튬 문제'의 핵심 내용과 가능한 해결책, 그리고 이 문제가 현대 우주론에 던지는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해 보겠습니다.
빅뱅 핵합성: 우주 최초의 연금술
리튬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주 탄생 직후에 일어난 '최초의 연금술', 즉 빅뱅 핵합성(BBN) 과정을 알아야 합니다.
- 시기: 빅뱅 후 약 1초에서 20분 사이, 우주의 온도가 수십억 도에서 수억 도로 식어가는 극히 짧은 기간 동안 일어났습니다.
- 재료: 이 시기 우주는 양성자, 중성자, 전자, 광자 등이 뒤섞인 뜨거운 '원시 수프' 상태였습니다.
- 과정: 온도가 충분히 낮아지자, 양성자와 중성자들이 서로 결합하여 더 무거운 원자핵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 양성자 1개와 중성자 1개가 결합하여 중수소(²H)를 만듭니다.
- 중수소들이 결합하여 헬륨-3(³He)나 삼중수소(³H)를 만듭니다.
- 이들이 다시 결합하여 매우 안정한 헬륨-4(⁴He)를 대량으로 생성합니다.
- 아주 극소수는 헬륨과 결합하여 리튬-7(⁷Li)이나 베릴륨-7(⁷Be)을 만듭니다. (베릴륨-7은 나중에 전자를 포획하여 리튬-7으로 붕괴합니다.)
- 결과: 이 과정이 끝났을 때, 우주의 일반 물질은 질량 기준으로 약 75%의 수소, 25%의 헬륨, 그리고 약 100억 분의 1 수준의 극미량 리튬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론과 관측의 충돌: 사라진 리튬
BBN 이론의 가장 큰 성공은, 이 예측값이 단 하나의 매개변수, 즉 중입자-광자 비율(baryon-to-photon ratio)에만 의존한다는 점입니다. 이 비율은 우주에 일반 물질(중입자)이 얼마나 있는지를 나타내는 값으로, 플랑크 위성이 관측한 우주 배경 복사(CMB)의 미세한 온도 요동을 통해 매우 정밀하게 측정되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정밀하게 측정된 중입자-광자 비율을 BBN 이론에 대입하여, 초기 우주에 존재했던 각 원소의 양을 계산했습니다.
- 수소와 중수소: 이론적 예측과 실제 관측값이 놀라울 정도로 잘 일치합니다.
- 헬륨-4: 예측과 관측이 매우 잘 들어맞습니다.
- 리튬-7: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BBN 이론은 수소 원자 100억 개당 리튬-7 원자가 약 4~5개 정도 있어야 한다고 예측합니다.
리튬 양은 어떻게 관측하는가?
초기 우주의 리튬 양을 직접 관측할 수는 없으므로, 과학자들은 우주에서 가장 오래된 별, 즉 우리 은하의 헤일로(halo)에 있는 '빈곤 금속 별(metal-poor stars)'을 관측합니다. 이 별들은 우주 초기에 형성되어, 이후 세대의 별들이 초신성 폭발로 만들어낸 무거운 원소('금속')가 거의 섞이지 않았기 때문에, 초기 우주의 원소 구성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살아있는 화석'과도 같습니다.
천문학자들은 이 늙은 별들의 대기에서 나오는 빛의 스펙트럼을 분석하여 리튬의 흡수선을 찾고, 이를 통해 리튬의 양을 측정합니다. 그런데 수많은 관측 결과, 이 별들의 리튬 양은 BBN 이론의 예측값보다 일관되게 약 3분의 1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별들의 리튬 양은 특정 값(스피트 고원, Spite plateau)에 평탄하게 분포하며, 예측치와의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빅뱅 리튬 문제'입니다.
사라진 리튬은 어디에? 가능한 해결책들
이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1. 천체물리학적 해결책: 별이 리튬을 파괴했다
가장 보수적이고 널리 연구된 가설은, BBN 이론의 예측은 맞지만, 우리가 관측하는 늙은 별들이 긴 시간 동안 내부에서 리튬을 파괴했다는 설명입니다.
- 리튬의 취약성: 리튬은 매우 '연약한' 원소입니다. 온도가 약 250만 K 이상으로 올라가면, 양성자와 충돌하여 쉽게 파괴되어 두 개의 헬륨 원자핵으로 변해버립니다.
- 별 내부에서의 파괴: 늙은 별의 대기(관측되는 부분)에 있던 리튬이 대류, 난류, 회전 등의 메커니즘을 통해 별의 더 깊고 뜨거운 내부로 운반되어 파괴되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현재 별의 표면에서 관측하는 리튬의 양은 초기 우주의 양이 아니라, 별의 일생 동안 파괴되고 남은 양일 뿐입니다.
- 문제점: 이 가설이 맞으려면, 질량이나 온도가 다른 수많은 늙은 별들이 모두 똑같은 비율(약 3분의 2)로 리튬을 파괴하여, 현재 관측되는 평탄한 '스피트 고원'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의 항성 진화 모델로는 이렇게 일관된 파괴 메커니즘을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2. 핵물리학적 해결책: 핵반응 데이터가 잘못되었다
BBN 이론의 계산은 리튬을 생성하고 파괴하는 다양한 핵반응의 '반응 단면적(reaction cross-section)' 데이터에 의존합니다. 만약 이 실험 데이터 중 일부가 잘못되었다면, 이론적 예측값 자체가 틀렸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베릴륨-7을 파괴하는 특정 핵반응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일어난다면, 최종적으로 생성되는 리튬-7의 양이 줄어들어 관측값과 일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수십 년간 전 세계의 수많은 핵물리학 실험실에서 관련 데이터를 정밀하게 재측정했지만, 리튬 문제를 해결할 만큼 의미 있는 오류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3. 새로운 물리학을 통한 해결책: 표준 모형을 넘어서
천체물리학적, 핵물리학적 해결책이 모두 막다른 길에 부딪히면서, 많은 과학자들은 리튬 문제가 입자물리학의 표준 모형을 넘어서는 '새로운 물리학'의 존재를 암시하는 단서일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 초대칭 입자의 붕괴: 초대칭(Supersymmetry, SUSY) 이론이 예측하는 미지의 무거운 입자(예: 그라비티노)가 BBN 시기 이후에 붕괴하면서, 고에너지 입자들을 방출하여 리튬의 전구체인 베릴륨-7을 선택적으로 파괴했을 수 있다는 가설입니다. 이 시나리오를 잘 조정하면, 다른 원소들의 양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리튬의 양만 줄일 수 있습니다.
- 기본 상수의 변화: 빛의 속도나 미세구조상수와 같은 기본 물리 상수가 초기 우주에서는 지금과 다른 값을 가졌을 수 있다는 가설입니다. 상수의 변화는 핵반응률에 영향을 주어 리튬 생성량을 바꿀 수 있습니다.
- 암흑 물질과의 상호작용: 암흑 물질 입자가 붕괴하거나 쌍소멸하면서 특정 방식으로 핵반응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탐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설들은 매우 흥미롭지만, 아직까지는 추측의 영역에 있으며 이를 뒷받침할 독립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결론: 표준 우주론의 작은 균열, 혹은 새로운 창?
빅뱅 리튬 문제는 현대 우주론의 눈부신 성공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해가 아직 완벽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수소와 헬륨의 놀라운 일치는 빅뱅 모델이 근본적으로 옳다는 것을 증명하지만, 리튬의 불일치는 마치 완벽하게 조율된 오케스트라에서 유독 한 악기만 불협화음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 불협화음의 원인이 별의 내부 활동에 대한 우리의 이해 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우주의 가장 초기 순간에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물리 법칙이나 입자가 작용했기 때문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습니다. 과학자들은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과 같은 차세대 장비를 이용해 더 많은 늙은 별들을 관측하고, 더 정밀한 항성 모델을 개발하며, CERN과 같은 입자 가속기에서 새로운 물리학의 단서를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리튬 문제는 표준 우주론의 '작은 균열'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 균열을 통해 초기 우주의 더 깊은 비밀과 표준 모형을 넘어서는 새로운 물리학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새로운 창'일 수도 있습니다. 이 사라진 리튬을 찾는 여정은, 우주의 기원에 대한 우리의 그림을 더욱 정교하고 완전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